[책 리뷰]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한국 독자들을 위한 특별한 선물, 그러나...
이번 책은 단편집이다. 책 안에 3가지 다른 스토리가 담겨있다. 맨션의 여자, 위기의 여자, 그리고 환상의 여자.
다른 분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해서 보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처럼 쉽게 읽히지만 너무 짧은 소설이 비싸다"라는 내용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소 진부해진 전개와 내용이 아니냐라는 의견도 보았다. 나도 두 번째 위기의 여자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한국 독자들을 위해 선공개 했다라는 뉴스 기사꼭지를 보면서 나는 기대하며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다시 돌아온 트랩핸드, 그리고 블랙 쇼맨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이라는 책에서도 도쿄의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간판도 없는 트랩핸드는 이번에도 소설의 주 무대가 된다. 아지트로 사용되는 트랩핸드라는 곳의 주인 또는 마스터는 가미오 다케시라는 인물이다.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말솜씨 덕분에 방문하는 손님들은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거나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사연 깊숙이 개입하여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트랩핸드는 단순한 바가 아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놓인 몇 개의 테이블, 다케시가 직접 만드는 칵테일,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속삭임.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와이프랑 연애할 때 이태원에서 우연히 들어간 아주 작은 바가 이런 트랩핸드의 느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혼자 해본다.
첫 번째 이야기: 맨션의 여자 - 뒤바뀐 운명
앞서 말했듯이 3가지의 독립적인 단편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 이야기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미망인이 건축사로 일하는 다케시의 조카, 마요와 함께 리모델링을 추진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 그 미망인은 내 동생이며 그렇기에 받은 유산의 일부를 본인도 받아야 한다며 주장을 하는 친오빠. 하지만 빌런인 그는 중병을 앓았던 동생이 지금처럼 쌩쌩하게 살아있음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내용을 조금 스포하면 서로 비슷하게 생긴 두 인물 우에마쓰 가즈미와 스에나가 나나에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 것. 즉, 타인의 인생을 빌려 살아가야 했던 한 여성의 사연을 중심으로 펼쳐지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나'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주민등록증? 가족의 증언? 아니면 기억? 다케시는 이 복잡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가며, 결국 진실에 도달한다.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그의 추리력은 가히 셜록 홈즈를 연상케 한다.
두 번째 이야기: 위기의 여자 - 칵테일에 담긴 경고
두 번째는 위기의 여자. 세 편 중 가장 짧은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재력을 자랑하는 남자와 그가 탄 약에 취할 뻔한 여자 미나의 이야기인데 역시나 트랩핸드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가미오 다케시의 관찰력과 작가의 빠른 내용 전개력으로 빠르게 읽을 수 있는 편. 특히 이 에피소드에서는 다케시의 '마술사'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약을 탄 칵테일을 발견한 다케시는 마술사의 트릭을 통해 바꿔치기해 위험에 처한 미나를 구한다.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 있는 전개와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세 번째 이야기: 환상의 여자 - 예상치 못한 진실
그리고 마지막 편은 환상의 여자이다. 정말 내용이 환상적이다(약간의 sarcasm). 읽는 내내 어떻게 이야기가 마무리될까 궁금했었던 편인데 결국은 아들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야기로 다소 아쉬운 결말로 된다. 물론, 그 전까지 갑자기 사고로 죽게 된 연인의 숨겨진 과거를 추적하며 펼쳐지게 되는 인간관계의 복잡성 부분과 가미오 다케시의 추리 부분은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김빠진 사이다를 마시는 것처럼 너무 맥 빠지는 아들의 트랜스젠더 결말은 다소 아쉽다. 사실 이 이야기는 세 편 중 가장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죽은 연인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 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인물들, 그리고 점차 드러나는 충격적인 진실. 다케시는 마치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단서를 연결해가며 진실에 접근한다. 그 과정은 분명 흥미진진했다. 다만 최종 반전이 다소 급작스럽게 느껴졌다는 점이 아쉬웠다. 현대 사회의 성 정체성 문제를 다루려 했던 작가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상 좀 더 자연스러운 결말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만의 매력은 여전하다
지금까지 여러 편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어본 것 같다. 항상 언급하는 부분이지만 작가의 빠른 내용 전개는 정말 최고라고 본다. 그리고 쉽게 읽히는 문체이다. 물론, 번역서를 읽는 것이니 그의 일본어로 씌여진 문체를 직접 흡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문장을 다시 돌아가 읽어야 되는 경우가 없다는 건 사실이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도 그의 특징인 '일상 속 미스터리'가 잘 드러난다. 거창한 살인사건이나 국가적 음모가 아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들을 다룬다고 본다. 그렇기에 더욱 현실적이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쉽다.
단편이기에 가능했던 강렬함
이 책을 읽어본 다른 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면 굳이 단편으로 책을 내었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그리고 내용이 짧아 몰입이 힘들었다라는 이야기도 꽤나 보였다. 나는 오히려 이런 부분이 내게는 장점으로 느껴졌다. 오히려 내용이 짧아서 다케시의 기지, 통찰력, 그리고 사건 개입과 해결력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단편이 가진 매력은 분명하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을 담아낸다. 장편에서는 여러 인물의 사연을 깊이 있게 다루느라 주인공의 활약이 분산될 수 있지만, 단편에서는 다케시의 능력이 집중적으로 부각된다. 마치 농축된 에스프레소처럼, 짧지만 진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마무리하며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는 분명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품이다. 짧은 분량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고, 일부 스토리의 결말이 아쉽다는 평가도 수긍이 간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그리고 새로운 시리즈의 탄생을 지켜보고 싶다면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읽기에 적당한 분량과 난이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좋았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그리고 다케시의 과거나 트랩핸드에 얽힌 더 많은 사연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때까지 나는 트랩핸드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상상을 하며, 다케시가 만들어줄 특별한 칵테일 한 잔을 기다려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