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블랙 쇼맨과 운명의 바퀴
시리즈 3탄, 그러나 추리소설이 맞나요?
블랙 쇼맨 시리즈 제3탄이다. 이번에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3가지의 단편 소설로 구성된다. 그리고 가미오 다케시가 등장하며 그가 운영하는 트랩핸드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하지만 먼저 고백하자면, 이 책은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펼친 독자들에게는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다. 《용의자 X의 헌신》 같은 치밀한 추리와 반전을 기대했다면 말이다. 오히려 이 책은 휴머니즘을 다룬 소설에 가깝다.
첫 번째 이야기: 천사의 선물 - 부모의 마음으로 읽다
"무뇌증 아이의 장기기증, 당신이라면?"
죽은 전 남편의 재산을 요구하는 며느리 vs 죽은 아들의 재산을 지키려고 하는 부부의 유산 상속 공방. 노부부가 마요를 통해서 아들의 유산을 지키려고 한다는 설정까지만 봤을 때는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아이를 이용해 유산을 상속받으려는 며느리'라니, 너무 뻔한 소재 아닌가?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 장기기증이라는 반전 카드를 꺼내든다. 무뇌증으로 태어나 오래 살 수 없는 아이. 그 아이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정한 부모의 마음. 같은 부모의 입장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라면 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강력한 NO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히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무겁고 다루기 힘든 윤리적 주제를 소설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조심스럽게 건드린다. 추리소설의 스릴보다는 휴머니즘의 울림이 더 크게 다가왔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가슴 한켠이 찡해졌다. 아마 부모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을까.
두 번째 이야기: 피지 않는 나팔꽃 - 엄마와 딸, 그 영원한 숙제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정말로 딸을 알아본 것일까?"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에서 등장했던 인물의 어머니가 주인공으로 이번에는 등장한다. 어머니의 과도한 간섭을 피해 자살을 위장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스에나가 나나에와 그 어머니의 이야기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치매의 정도가 조금씩 심해지는 노인. 하지만 죽은 딸의 시체를 확인했을 때 "내 딸이 아니다"라는 기억만은 또렷하다. 요양원 직원들은 치매 환자의 기억 조작이라고 넘겼지만, 지인으로부터 "딸을 본 것 같다"는 편지가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다케시의 해결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마술 공연을 빌미로 요양원을 방문하는 것. 나나에는 끝까지 신분을 감춘 채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조금은 억지스러운 방법으로 돈을 이체하며 어미니를 돕는다. 솔직히 이 두번째 이야기도 기존의 히가시노 게이고식 추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꽤나 먹먹해졌다. 미국에 살면서 부모님을 자주 뵙지 못하는 나에게, "돌아가시고 후회하지 말고 옆에 계실 때 잘해라"는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직 부모님 두 분 모두 건강하시고 화목한 가족이라는걸 그 누구에게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지만 항상 더 잘해드리지 못함의 죄송함은 장남으로 갖고있는게 사실이다. 어쨌든 두 번째 이야기 역시 추리의 쾌감보다 가족애의 울림이 더 컸던 이야기.
세 번째 이야기: 마지막 행운 - 꿈은 언제나 현재진행형
"접었던 꿈이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전작에서 가장 짧은 조연으로 등장했던 미나의 이야기다. 솔직히 처음엔 "항상 별로인 남자를 만나던 여자가 드디어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해졌다"는 진부한 스토리일 줄 알았다. 요즘 세대의 조건 우선 결혼관에 대한 비판쯤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건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과거에 접었던 꿈이 우연한 기회로 다시 펼쳐지는 과정. 희망적이고 감동적이긴 했지만, 추리소설로서는 가장 아쉬운 편이었다. 미스터리의 요소가 거의 없었으니까.
추리를 벗어던진 히가시노 게이고, 그래도 괜찮은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약점은 '추리소설답지 않다'는 것이다.
- 단서를 하나씩 모아가는 추리 과정? ❌
- 예상치 못한 반전과 범인의 정체? ❌
- 치밀한 트릭과 알리바이 붕괴? ❌
대신 이 책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 무거운 윤리적 질문들 ✅
- 가족애와 인간관계의 복잡함 ✅
- 꿈과 희망에 대한 따뜻한 시선 ✅
그래서, 이 책을 추천하는가?
이런 분들께 추천
-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면을 보고 싶은 분
- 가벼운 휴먼 드라마를 좋아하는 분
- 추리보다는 감동을 원하는 분
- 부모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싶은 분
이런 분들께는 비추천
- 본격 추리소설을 기대하는 분
- "누가 범인일까?" 같은 긴장감을 원하는 분
- 《용의자 X의 헌신》 같은 작품을 기대하는 분
마치며: 추리는 없지만 울림은 있다
《블랙 쇼맨과 운명의 바퀴》는 추리소설의 탈을 쓴 휴먼 드라마다. 가미오 다케시는 명탐정이라기보다는 따뜻한 해결사에 가깝고, 트랩핸드는 추리의 무대라기보다는 치유의 공간에 가깝다. "누가 살인을 저질렀을까?"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작은 힌트를 얻고 싶다면, 이 책이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쉽게 읽히는 문체로 무겁지 않게 사회적, 윤리적 문제를 다루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새로운 시도. 추리는 없어도 여운은 남는, 그런 책이다.